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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 목사 칼럼
작성일 2012-10-17 (수) 15:28
ㆍ추천: 1  ㆍ조회: 873      
IP: 121.xxx.154

종교개혁주일이 갖는 현대적 의의 

정용환목사(목포시온교회)

만추의 계절! 단풍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의 시체에는 쓸쓸한 애상이 담겨 있다. 한때는 녹색의 영광으로 치장한 나무에 온갖 새들이 날아와 그야말로 축제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잠깐이었다. 소슬한 바람에 가늘게 떨고 있는 나뭇잎은 인생의 짧음을 암시하리라.... 낙엽이 다시 나뭇가지로 되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낙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변에는 질병과 사고로 너무 일찍 낙엽이 되는 경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본다. 그래서 가을은 더욱 서럽다. 그러나 슬퍼할 이유는 없다. 낙엽이 무덤을 이룬 곳에서 다시 새싹이 돋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이요, 이 때문에 기독교를 소망의 종교라고 한다.

다다음주일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기념주일이다. 지금부터 490년전 15171031일에 독일 어느 대학교수가 그 당시 중세 카톨릭 교회의 부패에 대한 항의를 별로 특별하지도 않게 제기한데서 이루어졌다. 이 항의(protest)는 즉각 반응을 일으켰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웅장한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단순히 기독교 역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과 세계의 역사를 돌려놓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당시 부패하고 오만한 교회의 실상은 성직자로 있던 같은 동역자들에게마저 심한 혐오감을 주었고 결국 자성의 목소리가 아닌 척결과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개신교를 가리켜 흔히 “Protestant”라고 한다. 저항하는 자”, “항거하는 자라는 뜻이다. 개신교가 이처럼 “Protestant”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불의와 부패에 항거하며, 저항하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혁명을 종교개혁이라고 하는데 교회개혁 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개혁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참된 교회건설은 그들의 일관된 개혁정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리포메이션(The Reformation)을 일본에서 종교개혁이라고 변역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 번역을 따랐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살았던 18세기 영국 사회는 총체적 파탄의 시대였다. 거리의 1/4은 술집으로 가득 찼으며, 골목은 창녀들로 넘쳐났다. 빈곤과 무지에 찌든 일반 대중들은 술과 향락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교회 또한 질세라 부패와 타락이 도를 넘고 있었다. 뇌물에 의해 성직이 매매 되고 힘을 잃은 메시지는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급기야 기독교는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냉대 받고 무시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종교 개혁은 변질된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경 본래의 기독교로의 회복운동이었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하나님 중심이란 말을 하고 있다. 교황이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사죄와 은혜의 수여자라는 당시 교회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바로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의 유일한 그리고 최종 권위의 확인과 함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 교회 개혁 운동이 가져온 신학적 성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교회 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영적 부흥의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종교개혁은 16세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사회 곳곳에 그 개혁의 물줄기에 역행하는 모습이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변해버린 구석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기관과 단체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 속에 하나님은 뒷전에 두고 사람들의 소리만 무성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보니 말씀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간의 냄새에 싸여 성직자의 부패 타락성을 사회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오늘의 현실이다.

기독교가 사회적 지탄 거리가 될 수 있다는 자체를 어떤이는 기독교의 속성이라고도 하지만, 복음, 그 자체 때문에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것과, 기독교인들의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위 때문에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가는 대로 교회가 가고, 신학이 가는 대로 교역자가 간다는 말이 있다. 교회의 분쟁, 교역자와 교인간의 긴장, 교인 상호간의 불화 등 교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를 들라면 모두 목회자 자신에게서 비롯된 문제라 하겠다. 참으로 교회는 교회다워야 할 것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분명히 목회자가 크는 만큼 교회가 크고 목회자가 자라는 만큼 교회가 자란다는 확신이 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에게 있는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셨을까?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우심이고 또한 목사는 신학과 신앙을 바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신학교를 가진다는 것, 가장 많은 목회자와 교회를 가졌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우리의 면류관이 될 수 없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영적권위를 회복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자성(自省)운동이다. 중세기말 성직자의 타락, 그 영적 폐허의 현장에서 나온 경구는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 est evangelium laice)는 말이었다. 오늘 우리가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기념 주일에 우울하나마 우리들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계절이길 소망한다.